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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을 만나다①] 일이 어렵다고요? 오히려 좋은 기회입니다!

samsungshi 2012. 11. 29. 09:55

그는 어릴 때부터 유독 만들기를 좋아했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라디오를 뜯고 다시 맞춰보길 거듭했을 정도였죠. 중학교 때부터 도내 라디오 분해조립 경연대회에서 입상할 정도로 손재주가 좋았지만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답니다. 결국 그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등학교 대신 직업훈련원을 선택했습니다.

1981년 입사 이래 우직하게 한 우물만 팠던 시간은 그를 판금제관분야 대한민국 명장으로 만들었습니다. 바로 삼성중공업 생산기술팀(구조기술) 손창수 파트장의 이야기랍니다.


▲ 손창수 명장

판금제관은 금속을 자르거나 구부려 해양구조물, 철골, 선박 등의 형상을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산업인력공단은 작년까지 판금과 제관 분야로 나누어 명장을 선정해 오다가, 올해부터 판금제관 분야로 두 분야를 통합했는데요. 그러다 보니 손창수 파트장이 판금제관분야의 대한민국 명장 '1호'로 기록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답니다.

황량했던 3도크 터를 기억하시나요?


1981년 가을, 직업훈련원을 수석 졸업한 손창수 명장은 당시 취업 준비생들의 선망이던 삼성중공업에 당당히 입사했습니다. 입사 후에는 선박 철의장품 제작을 맡았는데요. 사다리 같이 작고 단순한 것을 만들다가 포어 마스터, 레이더 마스터 등 만드는 의장품의 규모와 비중이 조금씩 커졌답니다.

타고난 손재주에다 유난히 부지런했던 그 였기에 기능대회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는데요. 1988년 경남지방기능대회의 철구조물 직종에서 금상을 수상하고, 연이은 전국기능대회에서도 동상을 받았습니다.

"전국기능대회에서 처음으로 '명장' 칭호를 받은 선배들을 만났습니다. 그 때부터 막연하게나마 명장에 대한 꿈을 가졌죠."

1993년, 해양정도관리 분야에서 현장지원과 공법을 담당했던 그는 이듬해 새롭게 건설되는 거제조선소 3도크의 설비 제작을 담당하게 됐습니다. 길이 640미터, 폭 10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3도크. 그 곳에 설치된 골리앗크레인과 도크게이트가 그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습니다.


▲ 거제조선소 3도크 전경

"지금은 3도크가 없는 조선소를 상상할 수 없지만 1993년 당시만 해도 황량한 벌판 뿐이었어요.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 냈던 시간이 지금도 도크를 볼 때마다 흐뭇하게 떠오르곤 합니다."
 

"이 다리는 아빠가 만들었단다"


손창수 명장은 1996년부터 지금까지 해양플랜트 분야의 생산기술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이 곳에서 철골구조물 제작의 외길만을 걸었던 그는 사할린 해양플랫폼을 비롯해 서울 월드컵경기장, 인천공항, 영종대교, 서해대교 등 국내외 150여건의 대형공사에도 참여했습니다.

"이따금씩 제가 일했던 프로젝트 현장을 마주칠 때가 있습니다. 예컨대 가족들과 서해대교를 건널 때엔 인근 휴게소에 내려 다리에 남아 있는 제 이름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곤 하죠. 사실 서해대교 뿐만 아니라 모든 현장들을 지날 때마다 프로젝트를 수행하던 날의 기억이 또렷하게 떠오릅니다."


▲ 대한민국명장 수상 당시

놀라운 기억력의 비결은 철저한 프로젝트 기록. 현장 일선에서의 경험을 뒷받침하기 위한 꾸준한 자기계발은 판금제관 기능장과 용접 기능장 등 6개의 기술 자격증으로 남았습니다. 2006년 삼성중공업 사내 명장에 선정되기도 했던 그는 오늘날 삼성중공업이 실시하는 사내 기능경기대회에서 해양구조물 직종 문제 출제와 심사를 맡는 등 해당 분야의 일인자로 우뚝 서 있습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


수많은 프로젝트 가운데에서도 사할린 해양플랫폼 'LUN-A'와 'PA-B'엔 각별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평균 철판 두께가 70톤, 최대 두께는 110톤에 달했습니다. 용접량만 약 10톤에 달하는 초대형 구조물이었죠. 취부, 검사, 용접, 비파괴시험 등 해양작업공정이 복잡하다보니 처음에는 각 부재마다 반복작업이 산더미같이 불어나는 등 시행착오가 많았습니다."

손 명장이 럭비공 같은 공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짚어냈던 맥은 '정확한 공법'과 '물량 산출'. 그는 해양공사에는 최초로 DAP(Detail Assembly Process, 세부조립공정)를 작성하고 생산계획 및 예정작업량의 사전 관리에 나섰습니다.

갖은 어려움 끝에 2006년 여름, LUN-A 플랫폼이 탄생했습니다. 후속공사인 PA-B 프로젝트는 2004년 시작해 2007년 여름에 마무리됐죠. PA-B 플랫폼은 가로 1백미터, 세로 1백미터, 높이 1백20미터 규모로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고정식 해양설비로 인정받았습니다. 

이는 축구장 2배 넓이 그리고 건물 40층 높이에 달하는 크기입니다. PA-B 플랫폼은 규모 못지 않게 안정성까지 한차원 드높였다. 진도 7의 지진과 영하 40도의 극한 상황에서도 견딜 수 있는 강인함을 자랑한답니다.


▲ PA-B의 건조 당시 모습과 사할린 해상에 설치된 모습


"PA-B 프로젝트가 LUN-A 프로젝트보다 규모는 컸지만 오히려 수월하게 마무리됐습니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선행 프로젝트의 공법들을 꼼꼼히 기록해 둔 덕분입니다. 당시 제작했던 자료는 지금도 해양공사에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자료입니다. 이것만큼은 제 아무리 많은 돈을 줘도 살 수 없는 거죠!"
 

명장을 만든 '70:30 원칙'


손창수 명장은 특별한 원칙을 하나 갖고 있습니다. 바로 '70:30의 법칙'인데요.

"일을 하기 전 생각하는 데 70%, 실행에 30%의 힘을 분배하면 업무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고민한만큼 해당 분야에 대한 깊이를 키울 수 있기도 하죠."

어렵고 힘든 과제일수록 오히려 자기 발전의 좋은 기회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 고된 프로젝트를 끈질긴 노력으로 해결했을 때의 기쁨은 더없이 각별하다고 합니다.

그는 특히 신입사원들에게 항상 '왜?'라는 문제 의식을 가질 것을 주문한답니다. 끊임없는 문제 제기만이 현장에 눌러앉은 부조리의 원인을 찾는 길이기 때문이죠.

손 명장은 정년 이후 그 동안 습득한 기술을 바탕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소망입니다. 돌아보면 동료와 힘을 모아 새로운 공법을 만들고, 그 공법으로 프로젝트를 완수했을 때의 뿌듯함으로 살아왔던 세월이기에 그 기쁨을 후학들에게도 전하고 싶기 때문이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