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도는 명실상부 세계 조선해양산업의 중심입니다. 허나 60년 전에도 이 땅이 세계적인 유명세-비록 그 성격은 전혀 달랐더라도-를 떨쳤다는 걸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죠.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거제시 고현동에 위치한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을 찾았습니다.
요즘에는 6.25전쟁의 발발년도를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고 합니다. 6.25전쟁은 1950년 발발했습니다. 당시 남한군은 불과 한 달 만에 낙동강까지 밀려났습니다.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풍전등화 신세였는데요. 9월 15일, 유명한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뒤집는 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연합군이 얻은 것은 되찾은 영토만이 아니었는데요. 치열한 전투가 수많은 전쟁포로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피난민으로 북적이던 부산은 포로수용소 역시 포화 상태였습니다. 결국 1951년 2월, 유엔군 사령부는 대대적인 포로 수송에 나섰죠. 목적지는 내륙과 가까우면서도 충분한 물과 농지를 확보할 수 있는 섬, 거제도였습니다. 한때 거제도에 수용된 포로는 17만 명에 달했는데요. 오늘날 거제도에 거주하는 내국인 수(23만 8천여 명)의 70%를 넘는 규모입니다.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은 휴전 후 50여년이 흐른 2002년 문을 열었습니다. 유적공원 초입에는 거대한 탱크 모양의 조형물이 놓였는데, 전쟁 당시 남침의 선봉에 섰던 소련제 T-34탱크를 본뜬 것입니다. 탱크 안에서 양 진영의 주요 인물을 만나고 나면 포로수용소 디오라마관에 닿습니다. 디오라마란 배경과 미니어처 모형으로 재현한 역사의 한 장면이죠. 이 곳에서 방문객들은 밥을 짓고, 이발을 하며, 기술을 배우는 포로들의 모습 하나하나를 살피며 시대의 아픔에 감정이입합니다. 이어지는 6.25역사관은 한국전쟁의 주요한 진행과정과 함께 참전국 현황, 전쟁 속 삶의 모습을 만날 수 있죠.
전쟁 발발, 낙동강전선 방어, 인천상륙작전 등 한국전쟁의 큰 줄기를 이해했다면 이제 포로들의 삶을 본격적으로 들여다 볼 시간입니다. 그 첫 번째 만남은 포로들의 생활을 옮겨 놓은 포로생활관! 일켠 떠오르는 생각과는 달리, 포로들은 인도적인 대우를 보장받았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제정된 제네바 협정 덕분이었죠. 식재료 보급이나 신발 수선 등 간단한 노동과 사상교육을 마치고 나면 운동, 독서, 그림 그리기 같은 여가 활동에도 참여했죠. 배식 역시 넉넉했던 탓에 국군 사이에선 '포로 신세가 우리보다 낫다'는 푸념까지 나왔다고 하네요.
자못 평화로웠던 수용소의 풍경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총과 칼을 뺏겼을 뿐, 전쟁의 진정한 불씨는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서로를 대척점에 둔 사상의 차이는 '포로의 조직화'라는 새로운 국면을 열었습니다. 포로들은 해방동맹을 필두로 한 친공세력과 반공을 표방하는 반공청년단으로 나뉘어 극렬하게 대립했습니다. 1951년 여름, 휴전협상이 시작되면서부터 포로 송환 문제는 협상의 주요 현안 중 하나로 떠올랐는데요. 수용소 안팎의 의견 대립은 과연 어떻게 매듭지어졌을까요?
포로수용소 유적관은 당시 생활용품, 전쟁무기 등 전시물과 함께 반공포로 생존자의 생생한 증언을 담았습니다. 유적관 내 소극장에서 방영중인 단편 다큐멘터리 '자유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Freedom is not free)'에선 캐나다판 '태극기 휘날리며'로 알려진 허시 형제의 이야기가 심금을 울립니다.
'먼저 참전한 동생 아치볼드를 걱정하다가 자원입대한 형 조지프. 치열한 전투 끝에 치명상을 입은 그는 동생과 극적으로 만난 후 전사한다. 자신의 품 안에서 숨을 거둔 형을 평생 그리워하던 동생은 2012년, 유언을 통해 형이 잠든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합장됐다.'
올해로 휴전협정을 맺은 지 60년이 지났습니다. 문득 떠오르는 궁금증 하나, 북한으로 끌려갔던 국군포로들은 자유를 온전히 되찾았을까요? 정답은 불행히도 '아니오'입니다. 수용소의 터가 닳아 '유적'이 된 시간을 고스란히 국군포로로서 살아낸 사람들이 있습니다. 북한에 남아있는 5백여 명의 국군포로는 오늘도 젊은 날의 고향을 짝사랑하고 있습니다. 하얗게 샌 머리 같은 그리움은 언제쯤 가실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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