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박은 이 세상에서 많은 물건을 한꺼번에 실어 나를 수 있는 가장 큰 운송장비입니다. 아직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제품이에요. 그런데 선박 건조기술은 전세계에서 대한민국이 1등이죠. 전세계에서 1등인 이 선박을, 그것도 전세계에서 만드는 제품 중 가장 큰 제품을 내가 설계했다고 생각해보세요. 직접 해본 사람만이 그 자부심과 매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선체 길이 488미터. 축구장 4개를 이은 길이보다 더 깁니다. 게다가 전체 중량은 26만톤, 여기에 사용된 철판 무게만도 17만톤에 달합니다. 단순히 사이즈만 들어도 어마어마 합니다. 바로 삼성중공업이 건조중인 세계 최대 LNG-FPSO의 사이즈입니다. 이 설비의 설계를 '거제조선소의 배 박사' 박정기 차장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요즘 설계로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그를 거제조선소의 작은 쉼터 해피로드에서 만났는데요. 그의 설계 이야기를 들어보고, 선박에 관한 궁금증도 풀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박 차장이 담당하는 일은 선박의 뼈대를 만드는 구조설계. 구조설계란 쉽게 말해 실제 선박을 제품화 하기 위한 가장 첫 단계랍니다. 선박의 전체적인 구조를 설계해 강재 두께를 정하고, 안정성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선박을 건조하는 일은 바다 위에 건물을 짓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건물을 짓기 위해 철근 구조물을 세우는 것처럼, 선박의 큰 뼈대를 만드는 일이 구조설계입니다. 그 다음 상세설계로 들어가죠. 각종 조명이나 전기· 전자 설비는 전장설계, 계단이나 난간 등은 선장설계, 각종 배관은 배관설계, 선실에 들어가는 가구·벽지·공기 순환 설비는 선실설계에서 담당하는 등 설계도 다양한 파트에서 나누어 한답니다."
2002년에 입사해 거제조선소에 발을 디딘 지 어느덧 12년. 그의 손을 거쳐간 선박도 대략 30여척이 넘습니다. 보통 LNG선이나 Tanker와 같은 일반선은 12개월정도, FPSO와 같은 해양 특수선은 꼬박 18개월동안 설계작업에 들어갑니다. 그 중 박 차장이 맡은 구조설계 기간은 보통 총 설계기간의 1/3정도 차지하는데요. 해양 특수선의 경우는 설계기간 내내 혹은 선박을 인도할때까지도 설계 변경과 수정 작업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현재 건조중인 LNG-FPSO의 설계는 그만큼 다른 선박보다 오랜기간 공을 들였기 때문에 특히 애착이 간다고 하네요.
선박 설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히 도면. 실제 제품으로 탄생시키기 위해 정보가 명확하게 표현되어야 합니다. 당연히 선박을 설계하려면 배의 부력, 선형, 속력 등을 계산할 수 있는 전반적인 물리지식도 갖추어야 할텐데요.
"아무래도 물리지식이 필요하죠.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것들이라 어려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냇가 또는 욕조에 바가지 띄워 놓고 놀기(부력), 목욕탕 안에서 물 속에 손을 넣고 손바닥을 펴서 물을 밀어보거나 손 끝을 세워서 앞으로 물을 밀어보기(선형), 선반에 무거운 물건을 올려 놓기 위해 선반을 튼튼하게 만들기(구조) 등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원리들이 모두 선박 설계에 이용되는 물리학이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박 차장은, 비전공자라도 체계적인 교육을 받는다면 설계 업무에 도전해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선박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추진력)은 프로펠러를 통해 발생시키는데, 결국 선박을 움직이게 하는 힘은 바로 에너지 입니다. 파도의 저항을 이기기 위한 에너지를 선박에 공급해줘야만 선박이 움직이는 거죠. 그냥 떠 있는 것과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하나의 원리를 알아가면 설계 업무를 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인터뷰 도중 문득 컴퓨터가 없던 시절에는 어떻게 선박 설계가 가능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예전에 선배님들은 큰 제도판에 자를 이용해 일일이 선을 긋고 연필로 또박또박 글자를 써가면서 도면을 만들었어요. 지금은 컴퓨터로 실제 선박을 축소한 모형을 만들어 선박이 안전하게 운항할 수 있는지 검증해보는 것이 가능하지만, 과거에는 이 모든 검증을 일일이 계산기와 머리로만 해야했죠. 이런 노력과 수고가 있었기에 지금 우리나라가 세계 1등 조선 강국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태어나고 자란 곳이 울산이다보니 그는 어릴적부터 배를 접할 기회가 많았다고 합니다. 배에 관심있는 학생들이라면 전문 서적도 좋지만, 직접 눈으로 배를 보는 것이 가장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고 조언하네요. 마지막으로 그의 뒤를 따르게 될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부탁했습니다.
"역사상 바다를 지배한 나라는 모두 강대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지금 현재, 우리나라의 선박이 세계를 평정하고 있습니다. 세계 1등인 제품을 설계하는 일에 충분히 도전해 볼만 가치가 있는거죠. 많은 학생들이 저와 같은 꿈을 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나라는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인데, 기름을 뽑아올리는 배를 가장 잘 만든다는 것이 어찌보면 역발상이죠. 그러한 배를 만드는데 학생들이 도전하고, 함께 미래를 개척해나갔으면 합니다."
자, 그럼 이곳 블로그를 통해 들어왔던 선박과 관련한 궁금증 몇가지를 박정기 차장에게 물어보기로 하겠습니다.
Q. 보통 선박에 선실과 오피스의 수는 대략 몇 개 정도 되나요?
A : 일반선의 경우 보통 30여명이 선박을 운항해요. 그래서 선실과 오피스의 수도 많지 않죠. 보통 2인 1실 또는 3~4인이 1실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FPSO처럼 해상에서 장기간 체류하는 특수선의 경우, 많게는 300명 이상의 선원이 생활하게 되므로 많은 선실과 부대시설 등이 필요합니다.
Q. 선박의 평균 수명은 어느 정도 인가요?
A : 요즘 건조하는 선박은 보통 25년을 기준으로 설계합니다. 특수선의 경우 30~50년 정도 되기도 해요. 그런데 선박은 어찌보면 집과 비슷합니다. 일단 선박이 선주에게 인도되면, 선주는 목적에 맞게 사용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되팔수도 있거든요.
Q. 선박이 가라앉거나 흔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장치는 어떤 것이 있나요?
A : 선박이 가라앉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선박 내부에 여러개의 격벽을 만들어 놓고, 무게 중심이 낮은 위치에 올 수 있도록 설계를 합니다. 또한 선박은 밸러스트수로 무게중심을 잡는데요. 선박에서 누르는 무게와 부력의 관계를 정밀하게 계산해 가이드를 만들어요. 이렇게 정확하게 계산된 가이드로 선박을 운항하는데, 기준을 넘게 되면 알람 등이 울려서 선박에 문제가 있음을 선원들에게 알려줍니다. 특히 여객선의 경우, 흔들림(Rolling)이 크면 아무래도 승선감이 떨어지게 되니 선박의 측면에 별도의 날개(Fin stabilizer)를 부착하여 흔들림을 줄여주기도 합니다.
Q. 선박의 구상선수를 보면 대략 무슨 선종인지 파악이 가능한데요. LNG선이나 Tanker의 경우는 구상선수가 뾰족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요?
A : Tanker의 경우 가장 느린 속도로 운항합니다. 주로 가장 무거운 원유를 운송하죠. 그러다보니 물 속으로 많이 잠기게 되고, 속도를 빨리 하려도 해도 물의 저항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Tanker의 구상선수가 가장 뭉툭한 모양을 가집니다. 반면, 컨테이너선은 물건을 싣고 빠르게 이동해야 경제성이 높기 때문에 구상선수가 뾰족하죠. 철판을 그만큼 많이 휘게 하여 건조를 해야 하기 때문에 생산도 더 어렵습니다.
Q. LNG선을 설계했다고 하셨는데요. 멤브레인형과 모스형 LNG선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A : 아무래도 외형이 가장 큰 차이점이겠죠. 멤브레인은 8면체 형태로 선박의 철판에 별도의 멤브레인을 부착하여 생산하는 방식이고, 모스형은 커다란 구형 탱크를 외부에서 별도로 제작해서 선박에 탑재하는 방식이에요. 최근에는 대부분 멤브레인형 LNG선이 주로 건조되고 있습니다.
Q. LNG선은 설계에만 12개월이 걸려 전체 공정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고 들었습니다. 화물창 설계 때문이라고 하는데, 화물창은 어떻게 제작되나요?
A : 화물창은 철판에 볼트와 본드를 이용해 폴리우레탄과 알루미늄 재질의 멤브레인으로 만들어진 판넬을 목욕탕의 타일을 이어 붙이듯이 하나하나 붙여가며 만듭니다. 건조 기간을 단축하려면 아무래도 모든 화물창이 동일한 규격으로 되어 있어야겠죠. 화물창 내부에는 어떠한 물체도 있을 수가 없어요. -163도의 온도가 유지되어야만 천연가스를 액체상태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인데요. LNG선 화물창을 무한정 크게 만들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운항시 파도로 인한 화물창 내부 LNG의 움직임에 선박이 위험해 질 수 있거든요. 그래서 LNG선 화물창에 LNG를 실을 수 있는 양이 정해져 있습니다. 정해진 양만 싣고 운항하면 문제없도록 설계되어 있으니 안심해도 됩니다.
Q. LNG선의 사이즈는 계속 커지고 있지만, 화물탱크의 수는 변화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A : 아직까지는 세계 최대 크기의 LNG선도 화물탱크 5개로 충분합니다. 화물창의 크기를 크게하면 파도에 의한 화물창 내부 LNG의 움직임이 커져서 위험해지고, 그렇다고 화물창을 작게 많이 만들면 그만큼 비용이 크게 증가하기 때문에 모든 LNG선들은 표준적으로 4개 또는 5개의 탱크로만 만들어집니다.
Q. 보통 쇄빙유조선이나 드릴십은 360도 회전하는 추진기가 달려있다고 하는데, 그 외 선박들은 360도 회전이 불가능한가요? 양방향 운항과 일반 선박 운항의 차이점을 알고 싶습니다.
A : 선박의 특징은 전진은 쉬우나 상대적으로 후진은 어렵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선박이 자동차처럼 후진을 할 일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망망대해 바다에서 운항하는 선박은 크게 원을 그리며 한 바퀴 돌아 거꾸로 가곤 해요. 또 큰 프로펠러를 돌려 대양을 빠른 속력으로 항해하는데 360도 회전 프로펠러는 적당하지 않아요. 하지만, 쇄빙유조선이나 드릴십은 아주 좁은 해역을 운항하거나 시추시 정밀한 조종성능이 요구되기 때문에 대양을 항해하기 위한 대형 프로펠러보다는 자유로운 조종이 가능한 360도 회전 프로펠러가 더 유용합니다.
선박과 관련한 궁금증이 조금 풀리셨나요?
이제 여러분도 박정기 차장과 함께 세계 1등 제품인 선박을 건조하는 일에 한번 도전해보는 건 어떠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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